아편전쟁(1차:1840~1842, 2차:1856~1860)

잠자는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호구였던 형

명분 없는 전쟁의 대표격이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 결과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고 많은 물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제조업 1위였던 청나라와의 무역에서는 적자가 지속되었다. 근대화를 이룬 영국은 양복을 생산하기 위해 모직이 많이 필요했지만 청나라는 여전히 비단의 수요가 많았고 청나라로부터 차(tea) 등도 많이 수입하는 영국에 비해 청나라는 수입하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아편을 팔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청나라와 대등한 무역을 하려 했지만 세계 패권 국가라고 자부하는 청나라는 은혜를 베푼다는 듯이 조공무역의 개념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때까지 잠자는 호랑이 이미지였던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호구로 전락했지만 그들은 어쩌다 진 것으로 치부하고 패권의식을 그대로 가진 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지만(양무운동) 여전히 말을 타고 전통을 유지하는 등 그 속도는 매우 느렸다.

 

메이지유신(1868)

어쩔 수 없이 문을 활짝 열어버린 꼬마

이런 와중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다. 막부 시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했으나 외압을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지 천왕 때부터는 개국을 하자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일본은 서양에 사절단을 보낸 본 후 청나라와는 달리 전면 개방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량 생산 체제를 도입하고 그에 맞는 근대식 교육과정을 시작했다. 서양의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중앙집권화하며 전면적 근대화를 시작한 결과 짧은 시간 내에 빠르게 성장하였다.

 

임오군란(1882)

아는 형에게 도와 달랬는데 어느 새 커버린 동네 꼬마까지 시비를 걸다

여전히 패권의식을 가진 청나라는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일본 역시 서서히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려 했다. 그러던 중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에 항거하기 위한 군란이었다.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자 조선 왕실은 당시 지배적 패권 국가로 여겨졌던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좋은 기회라 여긴 청나라는 기꺼이 원군을 파병했고 조선에 대한 참견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은 원래 오랑캐 나라인 청나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급기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가 자주독립을 위해 청을 몰아내고자 당시 신식 군대를 가진 일본을 등에 업고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다. 그런데 군대 지원을 약속한 일본이 청나라와의 충돌을 우려하여 약속을 어겼고 결국 청나라 군대가 진압하면서 3일 천하로 끝이 났다.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과 경제권을 나눠 챙기고 조선에의 파병과 철수를 동시에 하기로 하는 등 텐진조약(1885)을 맺었다.

 

동학농민운동(1894)

기회다 싶어 대문 안까지 들어오더니 둘이서 마당에서 싸움질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이 대등한 지위를 유지하다 조선에서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고 이는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운동은 천도교 교조였던 최재우가 억울하게 처형당하자 교조의 신원 운동 차원에서 시작됐는데 정부가 강하게 탄압하면서 민란까지 더해져 점점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에 의해 전주성이 함락되자 정부는 청나라에 다시 파병을 요청했다. 텐진조약에도 불구하고 패권을 가진 강력한 청군이 들어오면 단번에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청군이 들어온지 불과 하루 뒤 조약을 내세우며 일본군도 들어오자 조선은 크게 당황하여 농민군들과 전주화약을 맺어버렸다. 당시는 농민들 입장에서도 불리한 때였고 모내기철이 되기도 하여 화약에 응한 것이다. 조선은 청과 일본에게 변란이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했지만 청과는 달리 일본은 사건을 조작해가며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일본은 청에게 같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자고 했으나 이미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더 컸던 청으로서는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독자적으로 갑오개혁(1894)을 요구하고 경복궁을 점령하는 등 난리를 치며 조선에게 청으로부터 독립하라고 압박했다. 이후 독립선언을 하자 청나라는 화가 많이 났고 이는 청일전쟁(1894)으로 이어졌다.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는 정말 놀랬다. 아편 전쟁은 어쩌다 진거라고 여겼고 일본 따위는 그때까지 신경도 쓰지 않던 나라였으니 충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을 통해 청나라에 배상금을 요구했는데 일본 정부의 4년치 세입 또는 현 시가로 1,000조 가까이를 받아냈다. 패권을 쥐게 된 일본은 신이 났고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아관파천(1896~1897)

많이 커버린 동네 꼬마를 지켜보던 또 다른 형집으로 피하다

청일 전쟁 후 청나라는 절충적 개혁인 양무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사회전반의 제도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변법자강운동(1898)이 일어났다. 청일 전쟁을 지켜보던 서양의 열강들은 자신들에게서 배워간 일본이 당시 패권 국가로 여겨지던 청나라를 이기자 이후 청나라를 무시하며 쳐들어와 나라 전체를 탈탈 털어버렸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한 일본은 또 청의 요동반도를 점령했는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러시아는 일본이 자신들의 코 밑까지 밀고 올라오자 프랑스, 독일과 연합하여 요동반도를 다시 찾아 청에 돌려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고종과 조선 정부는 러시아가 힘에 있어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여 러시아와 친해지려했다. 러시아 역시 일본에 비해 자신들이 당연히 더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을 물리치려 일본을 이용하려 했는데 이제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물리치려 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러시아나 서양과 대등한 힘을 보여준 일본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러한 이미지는 러일 전쟁(1904)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너무 심해지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자 고종은 러시아와 노골적으로 친해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화가 난 일본은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고 친일 내각을 세웠다.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은 을미사변을 겪고 너무 화가 나면서 두렵기도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 1년간 머물렀다(1896~1897). 러시아는 조선을 먹는데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부동항을 갖고 싶어했다. 

 

러일전쟁(1904)

우리 동네 싸움짱 인증

고종은 1897년 2월 20일에 돌아온 후 대한 제국을 선포했다.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고 주변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하고자 했다. 이때 러시아가 슬금슬금 아래쪽으로 내려와 만주를 점령(1900) 하며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자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1902).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극도로 안좋아져 결국 러일전쟁(1904.2.8)이 발발했다. 일본은 러시아를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선전 포고없이 선제 공격으로 압도한 후 협상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고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를 포격한 것이 시작이었다. 러시아는 내륙으로 유인하여 싸우려고 뒤로 점점 물러났고 근대에 대회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은 물자도 부족하여 불리함을 느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가 미완성 상태라 일본군 25만 명의 전쟁 물자를 하루에 단선으로 6량 정도 운행으로 해결해야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근대 무기 체계가 완비된 일본은 그 전까지 소총 정도로만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은 정신력(사무라이 정신)으로 싸운다는 일념으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다니며 작전 과정을 쓰거나 기습 작전에서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며 돌격(반자이 어택)하는 등 웃지 못할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대전차 총검술도 했는데 군도로 전차를 자르려고도 했다. 일본은 전쟁 전에 작전 계획을 매우 세밀하게 짰는데 언제나 자기편에 최고로 유리한 상태를 가정하여 짜다보니 실제 상황이 달라지면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러시아의 31만 군이 일본의 25만을 이기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도 물자가 부족한 상태였고 더욱이 러시아 내부에서 혁명(피의 일요일/1905.1.22)이 일어나 병력이 분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쓰시마해전(1905)

먼 길 돌아 지친 형을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박살내다

일본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깨부순 사건으로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다. 탱크나 공군 전력이 없던 당시는 유일하게 강한 화력을 보유할 수 있는 해군 전력이 최첨단 무기 체계였는데 일본의 해군은 당시 강력했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을 치러가는데 일단 기지가 있던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정비를 해야했다. 항로상 최단 코스인 대한 해협을 지나는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을 만나 처참하게 당한 것이다. 이 해전을 기점으로 이후 거함거포주의가 생겨났다. 그 전에까지는 작은 함포 간에 근거리에서 쏘는 추세였지만 이후로는 크고 사정거리가 먼 함포가 중요해진 것이다. 미국의 중재로 휴전 후 일본과의 협상(포츠머스 조약/1905.9.5) 테이블에 앉은 러시아는 일본에 완전히 진 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일본이 요구하는 전쟁 배상금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청일 전쟁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자와 돈이 소진되어 파산 직전이던 일본은 결국 배상금을 받지 못한 채 전쟁을 끝냈다. 일본 자체가 러시아에 비해 국가 역량이 딸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리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 러시아가 몇 달 정도만 더 버텼으면 일본은 무너졌을 수도 있었다. 러일전쟁 이후 서양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고 대한제국에 대한 영구한 영향력을 보장받았지만 자국에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한 전쟁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패권은 가져왔지만 내부적으로 국력이 너무 허약한 상태이던 일본은 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든지 통합을 시켜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또한 만주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쪽의 광대한 자원을 활용해야 할 필요도 느꼈다. 즉 정세적으로 조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일병합(1910)

동거라 쓰고 주거침입이라 읽는다

1905년에 을사조약(을사늑약)이 맺어져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어고 1910년 8월에는 한일 강제 병합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조선은 일본이 된거와 다름 없었다. 일본에서 얘기하는 한일합방은 대등한 의미가 있지만 한일병합은 일제의 침탈야욕을 표현한 용어이다. 1912년에는 중화민국이 설립되었는데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와는 달리 한족이 세운 중국은 애국심이 있었고 청나라처럼 호구가 아니었다.

 

만주사변(1931)

동네 망나니가 된 꼬마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고 일본은 내부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자원을 가지고 병참기지화 하려고 불법 침략한 것인데 압력을 가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세워버리게 한 것이다. 만주는 산업화가 잘 이루어진 곳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밭농사가 대규모로 가능했으며 인구도 이미 4천 3백만 명 정도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생산된 쌀은 대부분 일본이 다 가져가고 만주에서 생산한 옥수수, 콩 등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공급하던 시기였다. 화가 난 중국은 일본과 중일 전쟁(1937, 실제로는 만주사변 때부터로 생각함)을 벌였고 100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일본이 패했다. 중국은 청나라와 달랐던 것이다. 난징대학살(1937)도 중일전쟁 중에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동부전선에서 독일을 막아주었기 때문에 연합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이 일본에 대해 버틴 것이 2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육군이 중국과 정신없이 싸우고 있을 때도 간이 부어서 해군으로 하여금 진주만을 폭격해 미국을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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