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철학의 기원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연 현상이 신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결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경, 오늘날 터키 남서부 지방에 해당하는 이오니아 지역의 도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이전 세대와는 다른 방식, 즉 합리적이고 일반화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밀레투스 학파의 철학자로는 탈레스(물), 아낙시만드로스(추상적 개념인 '무한자'), 아낙시메네스(공기)가 있다. 하지만 아낙시메네스 이후 밀레투스 학파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학문적 계보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밀레투스에서 시작된 자연철학의 전통은 이후 고대 그리스의 여러 도시로 이어졌다. 에페소스에서 활동했던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보았다. 한편 이들과는 매우 다른 성격의 학파도 형성되었는데 피타고라스가 그 주인공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의 근원이자 변화의 요인이 '수'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은 17세기 이후의 유럽 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원자론과 4원소설이 등장했다." 20p

"데모크리스토는 원자론을 주장하는 한편 '있지 않은 것은 있는 것 못지않게 존재한다'고 하며 빈 공간(진공)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신이 진공이라는 쓸데없는 빈 공간을 창조했다는 생각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25p

"엠페도클레스의 네 뿌리 이론(4원소설)은 이후 고대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였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연금술사들에게 계승되어 오랫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물질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28p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에서는 밀레투스가 속한 이오니아 지역이 자연철학의 중심지였으나 페르시아 전쟁 이후 계보가 끊기고, 대신 아테네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철학자들이 등장하면서 학문의 중심도 아테네로 이동해갔다. 이들이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29p


2. 연금술

<출처 : 서강학보>


"연금술은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초기 이집트의 연금술 지식은 죽은 사람의 몸을 썩지 않게 방부 처리하는 기술과 관련이 있었다. 이집트의 연금술사들은 죽은 자가 사후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 연금술을 실행했다. 이후 서서히 연금술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금, 은, 구리, 철, 주석, 납, 수은, 이렇게 총 7가지 금속 원소를 다루는 방법으로 바뀌었다." 33p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금속 원소 7개와 행성 7개를 연관 지으려고 했다. 태양(금), 달(은), 수성(수은), 금성(구리), 화성(철), 목성(주석), 토성(납)" 34p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의 연금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이 만나서 연금술은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34p

"이슬람 연금술의 아버지인 자비르 이븐 하이얀은 황과 수은으로 금속을 만들 수 있다는 '황-수은 이론'을 만들었다. 황은 불타는 돌을 의미한다. 이 이론은 이후 유럽의 연금술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연소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플로지스톤 이론에도 영감을 제공했다." 36p


3. 근대 실험과학의 등장

"16~17세기를 거치면서 물질의 본질을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하는 철학 사조인 기계적 철학이 등장했다. 이들은 작은 입자들의 운동과 충돌로 모든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여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을 다시 받아들였다. 최초의 근대 화학자이자 근대 실험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보일은 원자론을 이용해 화학 현상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입자철학'이라는 철학을 발달시켰다." 40p

"라부아지에는 근대적인 원소 개념을 확립했고, 실험을 통해 원소의 수를 33개까지 확장시켰다.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물질을 원소라고 본 라부아지에의 생각과 돌턴의 원자론을 합쳐서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원소는 서로 다른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연금술사들이 오랫동안 이루고자 했던 원소의 변환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42p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자연이란 실험의 대상이 아니라 사색과 관조의 대상이었다.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만으로 그 본질과 진리를 깨달아 나가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실험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실행했던 사람들은 연금술사였다. 화학 실험이 최초로 시도된 곳은 알렉산드리아(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페르시아의 신비주의+이집트의 기술)였다." 51p

"연금술(구리->금) :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여)금속의 형상을 없애는 단계인 '흑색화'로 황화구리 생성 -> '백색화' -> '황색화' -> 황동 생성 -> 구리보다 6배나 비싼 값에 판매"

"실험이라는 행위는 자연을 조작해 인공적인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연구 방법이었다... 베이컨 등의 자연철학자는 실험을 과학 연구에 도입하려고 했으나-귀납법의 오류를 없애기 위해 엄밀한 실험 필요- 실험이 일상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실험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66p

"15~16세기의 과학 혁명 이전까지 자연철학자의 임무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실들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과학 혁명을 거치면서 지식을 생산하는 방법이 크게 바뀌었다. 과학 혁명 시기의 자연철학자들에게는 실험과 실험실이라는 인위적 환경에서 얻은 지식이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해졌다." 67p

"자연철학자들은 실험으로 얻은 결과가 보편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이용했다.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한다거나(갈릴레오), 실험 과정과 결과를 자세히 기록(파스칼) 또는 실험에 대한 증인, 즉 목격자(실제 목격자, 가상 목격자) 수를 늘리기도 했다(보일)." 67p


4. 여성 연구가

"라부아지에의 아내인 마리 앤은 영어를 공부해 영국 왕립 학회에서 보내오는 논문을 프랑스어로 읽어 주기도 하고, 반대로 라부아지에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실험 기구, 실험 과정 등을 그림으로 남겼는데 너무나 정확해서 지금도 라부아지에의 실험 기구들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96p

"여성이 고등 교육을 받기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귀족 가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 샤틀레는 수학과 실험과학 연구에 정진하여 <프린키피아>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 정도로 뉴턴역학과 기하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물리학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였던 볼테르의 연인이었다." 97p


5. 연소 이론과 산소의 발견

"18세기 말까지 과학자들은 연소뿐만 아니라 호흡이나 동물의 부패도 모두 플로지스톤이 공기 중으로 방출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플로지스톤 이론은 연소, 광합성, 소화, 호흡 등에 일관된 설명으로 제공함으로써 18세기의 화학에 튼튼한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화학을 통합된 학문으로 만들었고, 이 이론을 바탕으로 화학은 연금술의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 화학의 길로 나아갔다." 85p

"블랙의 이산화탄소 발견은 공기가 1가지 종류의 원소라는 전통적인 생각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양한 기체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들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88p

"프리스틀리는 공기들마다 화학적 성질이 다른 이유는 그 공기들마다 함유하고 있는 플로지스톤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774년 8월 1일 붉은 산화 수은을 렌즈로 가열한 후 발생하여 포집한 새로운 공기를 '플로지스톤 없는 공기'라고 불렀다. 공기 중의 플로지스톤이 수은 재(산화 수은)와 결합해 수은이 되었을 테니, 남은 공기는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기체는 오늘날의 산소였다." 90p

"셸레는 프리스틀리보다도 먼저인 1772년에 산소(불공기라고 부름)를 분리했고 연구 결과가 실린 책의 필사본도 1775년에 이미 완성했으나 인쇄소의 실수로 책은 1777년이 되어야 출판되었다. 여러 약품들을 직접 맛보며 연구한 결과 4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93p

"라부아지에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지만,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프린키피아>를 읽고 감동을 받은 후 수학적 정량화와 정확한 측정을 중시하는 물리학의 방법을 화학 분야에도 도입하고자 했다. 정밀한 측정을 중시하여 실험을 진행했는데 특히 정확하게 무게를 재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수은을 가열하여 산화 수은을 생성하는 실험에서 전체 공기 부피의 1/5가 줄어들었음을 알았다. 공기 중 20%가 산소임을 생각해 보면, 라부아지에의 실험이 매우 정확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97p

"수은 재(산화 수은)가 수은보다 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것을 보고 라부아지에는 수은이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기 중의 특정 성분이 수은과 결합해 수은 재가 형성된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99p


# 산소 발견 과정


1774년 8월 1일 프리스틀리는 수은 재를 가열하여 '플로지스톤 없는 공기'를 발견함.

1773~1774년 라부아지에는 수은을 12일 동안 가열하는 실험에서 전체 공기 부피의 1/5이 감소했음을 발견. 또한 수은 재가 수은보다 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것을 보고 특정 성분이 수은과 결합한 것이라고 확신함.
1774년 10월 프리스틀리가 라부아지에의 집을 방문하여 자신의 발견을 설명하자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없는 공기'가 자신이 찾는 바로 그 기체임을 확신함. 자신의 무게 측정 방법으로 이 기체의 존재 재확인. 자신의 실험을 거꾸로 실행해 산소를 다시 발생시키기도 함.
1778, 1779년 라부아지에는 자신의 새로운 연소 이론과 산성에 관한 이론을 담은 논문을 연이어 발표함. 무게를 증가시킨 바로 그 기체와 결합하면 물질이 산성(acid)으로 변한다고 생각하여 이 기체에게 산을 생성하는 원리(그리스어/oxygenic principle)라는 의미인 산소(oxygen)라는 이름을 붙임. 비금속+산소=산 -> 무게 증가

비슷한 시기에 산소를 최초로 발견한 세 사람 : 셸레, 프리스틀리, 라부아지에. 이 중 셸레가 가장 먼저 분리에 성공했으나 발표는 프리스틀리가 먼저 함. 산소라는 이름은 라부아지에가 붙임.


6. 주기율표

"음극선관에서 표적 원자에 전자를 쏘면 원자 내부에서 엑스선이 방출되는데, 모즐리는 이 엑스선이 회절되어 생기는 스펙트럼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방출되는 엑스선 진동수의 제곱이 그 원자의 원자 번호와 비례한다는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했다. 모즐리의 발견은 원소의 화학적 성질이 원자량이 아니라 원자 번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원자 번호의 증가에 따라 원소의 성질이 주기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129p

"오늘날의 주기율표는 원자 번호에 바탕을 둔 모즐리의 주기율표를 원형으로 한다." 130p

"주기율표에서 원자들이 배열되는 순서는 오비탈에 전자를 채워나가는 순서와 같다." 132p

"2016년 11월에 그동안 비어 있었던 원자 번호 117번 테네신이 원소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주기율표에는 모두 118종의 원소가 채워졌다. 주기율표에는 지구상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원소 91종뿐만 아니라 인공적으로 합성한 원소들도 포함된다." 133p


7. 화학의 정립

"라부아지에의 정확한 무게 측정 방법을 교훈으로 해, 화학은 물질의 성질을 연구하는 질적 학문에서 물질의 화학과 분리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학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01p

"당시 물질의 이름들은 '비너스의 독설' '머큐리신의 사자자리' '클라우버의 소금' '쿤켈의 인' '리바비우스의 향기로운 술' '엡섬의 소금' '안티몬의 버터' 처럼 발견자의 이름, 발견된 장소, 물리적 성질 또는 연금술에서 유래되어 모호한 것이 많았다. 라부아지에는 1787년 <화학 명명법>에서 물질들의 이름을 정할 기준을 제시했다. 화합물의 이름만 보면 구성 원소의 종류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더불어 이름을 통해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전체 과정에 대한 이해까지도 가능하게 해 주면서 화학은 과학의 한 분야로 정립되어 갔다." 102p



8. 물 - 화합물 증명

"물이 순수한 원소가 아니라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생각은 공기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를 발견했고, 라부아지에는 이 기체에 '산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소는 산소보다 먼저 발견되었다. 영국의 과학자 캐번디시가 금속을 산에 녹였을 때 나오는 가연성 공기를 순수한 플로지스톤으로 생각했다." 143p

<출처 : ZUM 학습백과>


"이 당시 화학자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질문 중 하나는 가연성 공기가 연소되면 무엇이 생기는가 하는 문제였다. 라부아지에를 괴롭히던 문제였는데 플로지스톤 이론으로는 잘 설명이 되었지만(가연성 공기인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므로 생성물 없음), 산소 연소 이론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781년 프리스틀리는 전기 불꽃을 이용해 가연성 공기와 보통 공기를 폭발시켜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으나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분석한 사람은 캐번디시였다. 프리스틀리의 실험을 되풀이 하면서 이슬이 맺히는 것과 내부 공기 부피가 1/5 정도 감소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순수한 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44p

"1787년 파리에 간 캐번디시의 조수가 라부아지아에게 캐번디시의 실험을 전해 주었다. 라부아지에는 수소의 연소를 산소 연소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바로 깨달았다. 라부아지에는 가연성 공기야말로 산소와 결합해 물을 만드는 기체라고 생각하고, 이 가연성 공기에 물을 생성하는 기체라는 의미로 수소(hydrogenerative gas, hydrogen)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을 순수한 원소라는 오랜 생각에 종지부를 찍는 주장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파리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을 모아놓고 물을 합성하고 반대로 분해하는 실험도 실시하였다. 물이 순수한 원소가 아니라 화합물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연소 이론을 완성했다." 146p


9. 원자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들 중 에피쿠로스학파는 고대 그리스 원자론의 영향을 받아 진공을 인정했고 기계론적 자연관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루크레티우스였다." 172p

"자연철학자들이 원자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이유 중 하나는 진공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 시기에 진공에 관해 연구했던 대표적인 과학자는 로버트 보일이다. 공기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물질이 단단한 입자로 구성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173p

<출처 : ZUM 학습백과>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을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 정립한 사람은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존 돌턴이다. 자신과 형이 색깔을 잘 감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색맹의 유전성을 연구해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색맹을 다른 말로 돌터니즘(dalton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3p

"기상학자이기도 했던 돌턴의 대기의 구성 성분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기체의 압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여러 기체가 혼합되어도 각 기체는 독립적으로 작용한다는 '돌턴의 법칙' 혹은 '기체 분압의 법칙'을 발견했다. 이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기체가 탄성을 가진 작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더 확장해 모든 물질은 원자라는 작은 입자로 이루어진다는 원자설을 주장했다." 174p


10. 분자설

"돌턴의 원자설과 게이뤼삭의 기체 반응의 법칙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아보가드로가 분자설을 제시했지만 두 가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첫째는 아보가드로가 주류 과학자가 아니었고(다른 화학자들과 교류를 거의 하지 않음) 다른 하나는 당시 받아들여졌던 화학적 친화력설-전기적인 인력에 의한 결합. 예) 물은 HO-에 의하면 분자 개념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학적 친화력설에 의해 물을 HO라고 할 수는 있지만, H2O라고 하려면 수소나 산소가 H2, O2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인데, 동일한 원자는 같은 전하를 띠고 서로 간에 척력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원자들이 서로 결합해 분자를 형성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155p

"물의 화학식에 관한 결론을 내리는 데는 유기화학 분야에서 이용되던 분자 구조 모델-유형 이론-이 큰 역할을 했다." 156p

"1860년 9월 3일 독일의 칼스루헤에서 개최되었던 국제 화학자 회의 후 아보가드로의 분자 가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칸니차로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받아들일 경우 원자량과 화학식 사이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원자량과 분자량에 관한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음을 주장하고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58p

"원자가(valence, combining power)는 수소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어떤 원자 1개가 수소 원자 몇 개와 결합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160p

"루이스는 옥텟 규칙을 받아들인 후 원자 내에서 전자들이 정육면체 모양으로 배열되어 각 꼭지점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정육면체의 꼭지점이 8개이므로 원자는 최외각 전자를 최대 8개까지 가질 수 있다." 162p

"우리가 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수없이 많은 물 분자들 간의 수소결합 덕분이다." 164p

"우주에 있는 전체 별 수의 백 만 배나 되는 원자들이 공유 결합과 같은 화학 결합에 의해 모여서 우리 몸을 이루고 있다." 166p


11. 전자 발견

"엑스선은 고속으로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크로뮴, 철, 코발트와 같은 무거운 원자에 충돌하면서 진로가 갑자기 바뀔 때나, 표적 원자의 전자가 튕겨 나간 자리를 메꾸기 위해 에너지 준위가 높은 궤도에 있던 전자가 에너지 준위가 낮은 궤도로 이동할 때 방출된다." 177p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1906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톰슨 자신은 자신이 발견한 미립자를 전자라고 부르는 것에 끝까지 반감을 가졌다고 한다." 180p

"톰슨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안에 있는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었던 1884년에서 1918년까지 배출된 과학자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7명, 영국 왕립 학회 회원이 27명, 물리학 교수가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180p

<출처 : ZUM 학습백과>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중요한 현상 2가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하나는 '수소 스펙트럼이 왜 불연속적인가'라는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이 불안정하다는 점이었다.  전자처럼 전기를 띤 물체가 운동할 때는 빛을 방출하기 때문에 이론상 원자들은 언제나 빛을 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잃어 원자핵 주위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83p

"덴마크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보어는 러더퍼드가 있던 캐번디시 연구소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보어는 에너지가 양자화 되어 있다는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을 반영한 새로운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184p


12. 방사성 붕괴

"1898년 마리 퀴리는 우라늄보다 400배나 강한 방사능을 가진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자신의 조국 폴란드에서 이름을 땀)을 발견했다. 퀴리 부부는 우라늄 광석에서 라듐을 분리하는 방법을 무료로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라듐 분리 방법을 특허로 등록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돈을 위해 지식을 파는 행위는 과학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라듐은 1950년애 중반까지 암 치료에 널리 이용되었다.. 퀴리 집안은 모두 5번이나 노벨상을 받았다." 190p

"방사성 붕괴 과정에서 방출되는 알파선과 베타선, 감마선을 비롯해서 엑스선, 중성자 등을 방사선이라고 한다. 많은 학자들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엑스선을 발견한 1895년을 방사선 연구의 기점으로 여긴다." 195p

"1895년 11월 뢴트겐은 크룩스 음극선관을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싼 다음, 음극선의 효과를 알아보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뢴트겐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광선이 음극선을 둘러싼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 사이안화 바륨을 바른 종이를 감광시킨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광선에 미지의 선이라는 의미로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196p

"마리 퀴리는 우라늄, 라듐, 토륨과 같이 주로 원자량이 큰 원소들이 강한 에너지를 가진 빛이나 입자를 내보내는 현상을 방사성(radioactivity)이라고 불렀다." 198p

"방사선과 관련된 연구는 곧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핵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였다." 198p

"1902년 초에 러더퍼드와 소디는 한 번 방사선을 방출한 토륨이 시간이 경과한 후 다시 방사선을 내보내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관찰한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원소가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원소로 전환된다는 획기적인 생각을 하게되었다." 200p

"한 방사성 원소가 다른 원소로 변환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새로운 방사성 물질들이 연구되면서 화학자들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원소를 구분하는 기준은 원자량이었고 가장 가벼운 수소 원자의 질량을 1로 잡고, 나머지 원자들을 수소 원자 질량의 배수로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수소 원자량의 배수로 나타낼 수 없는 새로운 원소들이 다수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들을 기존의 주기율표에 배치하는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디는 1913년에 '동위 원소' 개념을 제시했다. 동위원소들은 질량은 서로 다르지만 주기율표에서는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모즐리가 주기율표 배치 기준을 원자량이 아닌 원자의 전하량으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자의 전하량은 곧 양성자의 수이며 원자 번호이다." 200p


13. 양성자, 중성자 발견

"전하량을 이용해 주기율표를 정하면 방사성 붕괴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알파선은 헬륨의 원자핵을 의미하므로 어떤 원자가 알파선을 방출하면 원자 번호는 2만큼 감소한다. 주기율표에서 왼쪽으로 2칸이 옮겨지는 것이다. 어떤 원자가 베타선을 내보내면 원자 번호는 1만큼 증가하므로 주기율표에서 오른쪽으로 1칸 이동하면 된다." 201p

"원자핵의 전하량을 정량화한 사람은 러더퍼드였다. 1919년에 러더퍼드는 대기 중의 질소에 알파 입자를 충돌시키면 빠른 속도로 수소 원자핵이 방출된다는 사실, 수소 원자가 가장 가벼운 원자라는 점, 원소들의 원자량이 수소 원자핵의 배수라는 점 등을 종합해 모든 원자핵의 기본 구성 요소가 수소의 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양성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201p

<출처 : ZUM 학습백과>


"러더퍼드는 1919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신의 제자였던 채드윅을 발탁해 왔다. 채드윅이 방사선에 관한 기존의 실험 결과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동위 원소에 대한 의문점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202p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의 인공 방사성 원소 합성 성공은 '방사성 추적자'라는 기술을 낳았다. 방사성 추적자법을 이용한 대표적인 예로 1952년 방사성 인-32을 이용해 DNA의 이동 경로를 알아낸 실험을 들 수 있다. 생물은 화학적 성질이 같은 동위 원소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방사성이 없는 인-31대신 방사성 인-32을 추적해 생물체 내 인의 이동 경로와 인 대사 과정을 알아낼 수 있다." 204p


14. 핵 에너지 발견

"중성자 발견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양전하를 띠는 알파 입자 대신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서 핵을 변환하는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5p

"페르미는 라듐에서 방출되는 알파 입자를 베릴륨의 핵과 충돌시켜 얻어 낸 중성자로 수소 원자부터 점차 무거운 원소로 차례차례 포격을 거듭한 끝에, 인류 최초로 자연 상태에 없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만들어 냈다. 페르미 연구팀은 빠르고 에너지가 큰 중성자보다는 속도가 느린 중성자가 더 효과적으로 핵을 변환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당시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무솔리니가 히틀러처럼 인종법을 만들려고 하자 페르미는 자신의 유대인 아내가 위험에 처하게 될까 봐 1938년 12월 스웨덴에 가서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대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206p

"페르미가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과학자들은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 원자핵을 변환시키는 연구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종류의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들어 냈다." 206p

<출처 : ZUM 학습백과>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된 1938년 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그 당시까지 알려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핵반응을 얻었다. 당시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라늄(92)은 자연 붕괴를 통해 방사선을 방출하며 차츰 원자 번호가 줄어들다가 안정된 납(82)에 이른다. 즉 자연 상태에서 우라늄은 주기율표의 가까이에 있는 원소들로 순차적으로 변환된다. 하지만 한과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우라늄의 핵이 거의 절반으로 분열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우라늄이 거의 반으로 쪼개지면서 바륨(56)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다시 2~3개이 중성자가 나온다. 이 중성자들이 다시 우라늄을 쏘아 연속적으로 핵분열을 일으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연쇄 반응이다. 중요한 것은 원자가 쪼개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1g의 우라늄-235가 완전히 핵분열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은 거의 석유 2,650L를 연소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양과 같았다." 207p


15. 맨해튼 프로젝트

"연쇄 반응을 이용하면 가공할 위력을 가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낸 것은 독일이었다. 원자핵 연쇄 반응을 통해 원자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헝가리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였다. 실라르드처럼 히틀러 정권을 피해 독일을 탈출했던 물리학자들은 1939년 여름에 한데 모여 독일이 우라늄 연쇄 반응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빨리 알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는 가장 유명한 과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던 아인슈타인이 대표로 서명했다." 209p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핵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던 연합군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이다." 209p

"1942년 말, 페르미와 실라르드는 시카고 대학교 축구장 관람석 아래쪽에 흑연 파일을 건설했다. 시카고 파일 1호기(CP-1)라고 불리던 이 흑연 파일이 바로 세계 최초의 원자로이며, 여기에서 페르미 팀은 연쇄 반응 제어에 성공했다." 211p

"우라늄을 이용한 핵폭탄과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폭탄은 제조 방법이 달랐으나 기본 원리는 같다. 핵분열을 할 수 있는 물질 조각들을 아주 빠르고 큰 힘으로 합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임계 질량에 이르게 되고 아주 빠른 속도의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우라늄-235를 이용한 원자 폭탄은 우라늄-235로 만든 총알로 우라늄-235를 때리는 총격 방법을 썼다.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리틀 보이'는 이런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212p

"플로토늄을 이용한 원자 폭탄에는 내파 방법이 이용되었다. 플루토늄은 연쇄 반응이 일어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핵분열을 하는 성질이 있는데 모든 방향에서 압착을 가해 순간적으로 임계 질량에 도달하게 함으로써, 자발적 핵분열보다도 먼저 핵 연쇄 반응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다. 1945년 8월 9일에 나가사카에 떨어뜨린 플루토늄-239 폭탄 '팻 맨'이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213p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30분, 인류는 최초의 원자 폭탄을 성공적으로 떠뜨렸다. 이 시험 폭파에는 트리니티 실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트리니티 실험이 실시된 지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일본에는 2개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214p



- 『세상을 바꾼 화학』 (원정현)에서









반응형

+ Recent posts